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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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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화요일 이유 없이 머리가 묵직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괴로울 때가 있다. 고질적인 두통이긴 하지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이러저러하다고 말하고, 수납 창구에서 돈과 종이를 교환해서 다시 그걸 약으로 교환하는 간단한 절차를 거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굳이 의사를 찾지 않아도 된다. 그 이유를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눅진한 베개는 간밤에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려가며 잤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뒤척인 흔적마다 불쾌한 갈색으로 말라붙은 자국을 보며 깨닫는다. 분명히 얼굴도, 거울을 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의 몰골이 되어 있겠지. 베개와 이불의 커버를 벗겨내 버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시간이 지나서 갈색으로 변해 버린 핏자국에서는 더 이상..
소녀는 밝은 대낮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굳이 땅거미가 어둑하게 내리는 때에 호숫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이 되면 마족 스크롤에 지배받는 광폭한 짐승들이 소녀를 향해 달려들 지도 모르지만, 소녀에겐 그 정도는 별로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사실 혼자서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정령이 묵묵히 소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 실린더의 정령인 그가 소녀의 뒤를 따랐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의 본체인 실린더는 계약자의 등 뒤에서 불빛을 번쩍이고 있는 타워 실린더였으니까 딱히 어폐가 있는 것도 아니리라. 며칠째 꾸준히 소녀는 황혼이 어스름하게 내릴 때 쯤이면 이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집시 캠프를 찾아가, 매번 귀찮다는 듯이 그녀를 내치는 엘프 처녀에게 꽃을 한 송이씩 억지로 건네..
사막이라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얀 모래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것을, 나는 딱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떠올릴 때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하게만 느껴지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나는 기억합니다. 구름에 가려진 해 때문에 푸른 달이 어색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하얀 모래 위를 맨발로 걸어가면, 출렁이는 모래가 발자국을 덮고 그 위를 다시 빗방울이 발자국을 새기던 이상한 순간을. 매일 똑같은 나날 중에서도 이렇게 창문을 부숴 버릴 듯 한 거센 비가 내리는 날은 늘 그 날을 떠올립니다. 방금 내 연구실에 노란 장미꽃을 두고 간, 그때 보았던 사막의 달 같은 푸른 눈을 한 여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만. 폭우가 쏟아지는 날, 사막, 노란 장미, 일상
흔적 아마 해가 중천에 떴을 것이다. 블라인드 사이로 듬성듬성 새어 들어오는 빛이 머리만 빼놓고 이불에 둘둘 말린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소녀의 위로 규칙적인 그림자가 되어 내려앉아 있는 것을, 멍한 머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짐작할 뿐. 불현듯 시선을 돌린 손등과 팔뚝에는 이미 딱지가 앉아 버린 손톱자국이 선명하다. 고통을 느낄 만한 상처도 아닌데, 그 조흔爪痕에서 느껴지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쓰라림 같은 것이다. 간밤의 나는 앙칼지게 발톱을 세우던 올리브색 눈동자의 새끼 고양이를 가차 없이 물어뜯는 개에 불과했었기에. 소녀의 제멋대로 엉켜 있는 머리카락을 들추어 보면, 부러질 것 같은 목덜미와 어깨에도 선명한 잇자국이 흉터로 남아 있겠지. 환한 대낮, 이불 ..
내가 불쌍하기 때문이야?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목소리는 나오지 못하고 입김이 되어 반지하 방에 내려앉을 뿐이다. 분명히 너의 입에서 어떠한 대답이 나오든 간에 그것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정말로 너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올까 봐 두려운 것이다. 네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질문이 너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릎을 세워 웅크린 채로 태연히 텔레비전의 화면을 쫓고 있는 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의 기민함이 뭐든지 다 알아챌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너를 향한 감정이 연민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이미 너는 다 알고 있었을 지도 ..